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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20년 넘게 살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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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까지 하다 경북 구미에 내려와 산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박사과정 때 전공이 교육심리학이라 지역사회에서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정서나 행동양식을 심리학적으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중립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글도 어느 쪽 편을 들지 않고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분석하려고 합니다.


구미라는 도시는 한때 산업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삼성과 LG 등 대기업들이 활발히 가동되던 시절엔 젊은 인구도 많고 활기가 넘쳤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대기업들은 대부분 빠져나가고, 남은 건 중소기업과 자영업, 그리고 공단에 의존한 일자리뿐입니다. 도시 전반이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시민들의 정서도 자연스럽게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으로 흘러갑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런 흐름은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삶이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익숙한 선택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구미 시민들, 특히 연세 있으신 분들이 보수 성향을 가지게 되는 건 이와 같은 심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미에 살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부분은 어르신들 중 상당수가 단순한 보수 성향을 넘어 ‘극우적 정서’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이건 개인적인 성향이라기보단 정보 환경과 사회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결과로 보입니다.


많은 어르신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시긴 하지만, 정보의 출처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친구나 지인, 가족으로부터 카카오톡으로 전달받는 유튜브 영상이나 기사 링크가 거의 전부입니다. 

 

문제는 이 정보들이 대부분 편향적이라는 겁니다. 어떤 건 명백한 가짜뉴스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가용성 휴리스틱’이라고 부르는데, 반복해서 접한 정보가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느껴지는 경향을 말합니다. 

 

매일 반복적으로 특정 성향의 영상이나 글을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세상의 진실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게다가 이런 정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지역 어르신들 모임에서 누군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대부분은 따돌림당하거나 ‘별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노년기엔 인간관계가 좁고, 소속감이 매우 중요한데, 이런 분위기에서 비판적 사고를 한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결국 생존을 위해 다수의견에 맞추는 방식으로 사고방식을 고정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흐름은 ‘집단극화’라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모이면 그 생각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강해지는 현상입니다.

 

 결국 서울처럼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점차적으로 한쪽 성향에 물들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에 사는 ‘멀쩡한 사람’이라도 같은 환경에 오래 노출된다면 생각이 급격히 편향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심리적 요인은 자존감과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구미의 어르신들은 한때 산업화의 주역이었습니다. 

 

나라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왔다고 자부하던 세대죠. 그런데 지금은 그 위상이 약해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계십니다. 

 

이럴 때 자신을 인정해주는 메시지, 예를 들어 “당신들이 나라를 지켰다”, “지금 나라가 공산주의자들에게 흔들리고 있다” 같은 말은 굉장히 강한 심리적 위안을 줍니다. 

 

이런 메시지를 통해 자존감을 유지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겁니다.


서울에서 살 때는 다양한 정치적 시각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미에선 이런 다양성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어르신들 사이에선 사실상 한 방향의 정보만 흐릅니다. 문제는 이게 반복되고 구조화되면서, 잘못된 정보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해지고, 오히려 비판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비판’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해’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어떤 환경과 심리적 조건이 작용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교육, 다양한 시각을 접하게 하는 정보환경을 제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신념을 바꾸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강하게 반박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감만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교육심리학적으로 보면, 신념을 바꾸려면 먼저 감정에 공감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조금씩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20년 넘게 구미에서 살아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정보의 편향성과 사고의 고립입니다. 이런 문제는 구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지역사회가 겪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중립적인 사고, 비판적인 시각,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열린 환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정치 성향을 떠나, 우리는 다시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사실에 기반한 정보를 공유하며,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시작은 아마도 아주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부모님이나 어르신들이 왜 그런 영상만 보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셨다면, 우선 그분들이 어떤 환경 속에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조정해드리거나, 조금 더 다양한 뉴스 소스를 추천해드리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지평은 조금씩 넓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실을 강요하기보다는,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 그것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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