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훈이를 하늘나라로 보낸 지 두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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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일 힘든 것은 먹을 때입니다.
음식을 앞에 놓고는 먹일 수,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때마다 목이 메이고 눈물만 흐릅니다.
문득 문득 문을 열고 '아부지'하면서 들어올 것만 같아 현관문만 쳐다봅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버지로서 할 게 있었는 데, 지금은 전혀 없다는 게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저의 아버지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책에서만 찾으려 했고, 아버지로서 엄격하면서도 자상해야 하며 아들에게는 ‘독립심’을 갖게 하는 게 저의 역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넘어져도 혼자 일어나기 전까지 절대 일으켜 주지 않았습니다.
함께 아파트 재활용장에 놓여져 있는 쓸만한 장난감을 씻어 사용하게 하여 절약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5살 때인가 태권도 학원을 가고싶다 해서 보냈고 중간에 포기하려고 할 때 본인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목숨이 위태롭지 않으면 끝까지 지키라고 해 초등 졸업전 4품을 받았습니다.
어디엔가 갈 때는 항상 앞에 세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들이 판단하게 했습니다. 그 판단과 생각이 부실해도 참으면서 같이 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부모없이 혼자 계획을 세워 외국을 다니게 했습니다.
등이나 변기 고칠 때도 함께 일하며 배우도록 했습니다.
봉사활동에도 많이 보내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습니다.
유명한 자사고에 보내 너무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자퇴시킨 후 다음 해에 다시 일반고에 입학시키면서 ‘인생은 한발 뒤에서 보면 별거 아니란다. 앞에서의 삶도 좋지만, 남들 뒤에서 한 번 더 웃으면서 사는 삶도 행복하단다’라고 한 뒤부터는 친구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자식에게 효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몸이 불편하신 장인을 모셨고 저희 집에서 돌아가시기까지 12년 동안을 함께 했습니다.
서울의 유명 대학에 모두 합격하고도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사관학교로 갔습니다. 내심 서울로 보내고 싶었지만 제가 그렇게 키웠기에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교직에서 올해 퇴직했으며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지만, 자식들에게는 싸구려 핸드폰만 사주었고, 주위에서 물려받은 옷을 주로 입혔습니다.
돈의 가치보다는 스스로 판단하는 삶의 기준이 행복을 결정하고, 웃으면서 사는 것이 좋은 인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몇 년 전 군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표현을 ‘아빠, 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돼’라고 했을 때, 저는 ‘힘들면 군에서 나오거라, 거기 말고도 먹고 살아가는 방법은 많단다’라고 했고 ‘어른이 되었으니 네가 판단하거라’라고 했을 뿐 아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좀 더 살펴보고 날아다녀서 안 되는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음을 알았어야 했는데 어른이 되었다고 방관한 저 자신이 매우 후회스럽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께서도 내 자식이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너무 믿지 마시고 가끔 주위에 위험한 것이 없는지 부모로서 잘 살펴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고 이태훈소령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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